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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 낙동강 시대] [35]성주 무릉마을(1)
작성자 참외향기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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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11-03-26 10: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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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낙동강 시대] [35]성주 무릉마을(1)
'시집가기 전까지 쌀 서 말 먹기 힘들다' 던 그 땅이…
 
 
 
 
참외 비닐하우스가 끝없이 펼쳐진 후포평야.
 
1960년대 백천과 낙동강 범람을 막아 기름진 옥토를 만들었던 후포평야 옆 후포제방.
 
하늘신, 강신, 마을신에게 제를 올렸던 용주산 당제당 터.
동쪽 낙동강과 서쪽 용주산이 둘러싸고, 남쪽으로 백천과 신천이 기름진 평야를 만든 성주군 선남면 선원1리 무릉. 마을은 낙동강과 백천이 삼각지 형태로 만든 낮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선원리에는 무릉과 도원, 새창, 파밭골 등 4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땅의 형태와 산수가 중국의 무릉도원(武陵桃源)과 비슷하다고 하여 이 마을은 무릉, 옆 마을은 도원으로 불린다.

마을지 등에 따르면 조선 1418년 차(車)씨 성을 가진 상인이 낙동강 수로를 활용해 물품을 옮기던 중 숙소를 마련하기 위해 집을 지은 것이 계기가 돼 마을이 조성되었다. 차 씨는 숙소를 지은 뒤 이 마을을 ‘무릉'(武陵)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선원리의 경우 일제강점기인 1930년 한 주민이 무릉과 도원에는 신선(神仙)이 있다고, 선원(仙源)이라고 지명을 지었다는 것.

성주대교가 개통되고 공단이 들어선 1990년 이전까지 무릉은 강과 하천으로 둘러싸여 외지인들의 출입이 거의 없고, 봄을 전후해 낙동강의 짙은 안개로 말 그대로 '무릉도원'을 연출했다.

◆천왕과 용왕, 동신에 올리는 마을제사

무릉의 마을 제사는 1950년 6`25전쟁 이전까지 엄격하게 지냈다. 무릉과 도원, 새창 등 3개의 자연마을에서 동제가 동시에 진행됐는데, 각 마을의 당나무는 남편(할배)과 아내(할매), 아들 등으로 표현됐다. 세 마을이 한 가족으로 인식될 만큼 친밀했다는 얘기다.

동제는 매년 정월 초사흗날 ‘대내림’으로 시작됐다. 주민들이 그해 동제를 주관할 사람을 정하면 바로 대잡이가 된다. 대잡이는 용주산에 올라 술잔을 돌리며 대내림을 받는다. 하늘신(천왕)과 교감, 대를 통해 신내림을 받는 것이다. 대잡이가 마을로 내려와 가장 먼저 들어가는 집의 가장이 바로 제관이 된다. 다음으로 두 번째 들어가는 집에서 축관, 세 번째 들어가는 집에서 유사를 각각 맡게 된다. 제관과 축관, 유사는 그날부터 제사를 올리는 순간까지 아침저녁으로 목욕을 하며 몸을 정갈하게 유지해야 한다. 남의 집에 함부로 출입을 하지 않고, 마을의 다른 이들도 제관과 유사 등의 집에 들어갈 수 없다. 제관과 축관, 유사의 집에는 소나무를 꺾어 금줄을 쳐놓고 집 입구에 황토를 뿌려둔다. 주민들은 마을 주변을 청소하고, 외부인들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이미 마을로 들어온 외부인은 동제를 마칠 때까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마을 입구에 금줄을 치고, 마을길 주변에 황토를 뿌려놓음으로써 이 같은 금기사항을 알린 것이다.

박문출(84) 씨는 “마을에 잡귀가 못 들어오게 황토를 놓는거라. 주민들도 정성을 들이고. 밖에서 손님이 왔을 때, 보름날 끝까지 동네 밖에 못 나가게 해”라고 말했다.

정월 열나흗날 새벽 제관과 유사는 제사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성주읍내로 향한다. 다른 주민들이 보기 전에 일찍 마을 뒤쪽으로 난 돌찌고개를 넘어 성주장으로 갔다. 제수는 돼지고기, 백설기, 삼실과(대추, 밤, 감) 등이다. 제수는 천왕이 먼저 드시기 전에는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에 간을 하지 않는다. 돼지고기도 삶아서 올릴 뿐이다. 밤 10시쯤 제관과 축관, 유사 등 3명은 준비한 음식을 갖고 마을 뒷산, 용주산 소나무가 있는 동제당으로 올라간다. 초헌과 아헌(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의 순으로 잔을 드리고 절을 한 뒤 소지(燒紙:흰 종이를 불사르며 신에게 소원을 빔)를 올린다. 이때 소지는 하늘의 천왕, 낙동강의 용왕, 그리고 마을을 지키는 동신에게 차례로 올린다. 다음으로 주민과 가축 등 마을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 소지를 올려준 뒤 동제는 막을 내린다. 무릉의 동제는 ‘천왕제’ ‘산제’ ‘웃제’ 등으로 불렸다. 동제에 참석하지 않은 마을 주민들은 모두 자신의 집에서 잠을 자지 않고, 동제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동제를 올린 뒤 정월대보름날 오전 주민들은 제관의 집으로 찾아가 인사를 건넨다. 이어 유사의 집에 모여 제사 음식을 나눠먹는다. 음복을 하는 것이다. 음식에 대한 간은 이때 비로소 행해진다. 주민들은 음복 이후 함께 모여 풍물을 울리며 ‘지신(地神:집터를 지켜주는 신)밟기’를 하고, 저녁이 되면 달집태우기를 즐긴다.

배한이(86) 씨는 “제 다 지내고 와가 다음날이면 유사 집에 모여가 음식을 묵는 기라. 묵고 난 다음 풍장(풍악) 치면서 같이 놀고, 저녁엔 뒷동산에 모이가 소나무 가지 꺾어 달불도 놓지”라고 말했다.

◆후포평야와 농사

무릉 남쪽 신천과 백천에 싸인 후포평야는 무릉마을을 비롯해 선남면 일대 주민들을 먹여살리는 옥토다. 동쪽의 낙동강, 남북으로 각각 둘러싼 두 하천 등이 공급하는 풍부한 습기가 삼각형의 거대하고 기름진 땅을 만들어놓았다. 흰 가래떡이 일렬로 누워 있는 것처럼 참외비닐하우스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해방후 ‘시집가기 전까지 쌀 서 말 먹기 힘들다’고 했던 무릉은 1960년대 초반 낙동강 제방공사를 계기로 변화의 급물살을 탔다.

▷1960년대 이전 피와 서숙, 청국밀

1960년대 이전까지 낙동강변과 후포평야 일대에는 기껏해야 피나 서숙(조), 청국밀(기장) 등을 재배하는 데 그쳤다. 해마다 장마철에는 물이 넘쳐 마을을 집어삼켰기에 쌀농사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당시 무릉 처녀들은 1년간 쌀 서 말을 먹기 힘들 정도로 쌀 구경하기가 어려웠다는 것. 무릉 낙동강변 등에는 봄철 물이 빠져나간 뻘과 같은 곳에 피나 서숙을 주머니에 넣어 ‘휘휘’ 뿌려 재배한 뒤 수확했는데, 물에 잠기면 수확을 아예 포기해야 했다.

62년 국가 차원에서 낙동강 제방공사가 이뤄졌고, 무릉 주민들은 직접 등짐으로 흙을 날라 낙동강과 백천 변에 제방을 쌓았다. 이렇게 확보된 토지는 낙동강과 백천, 신천의 물을 머금어 다른 어떤 땅보다 기름진 옥토로 바뀌었다.

장상규(75) 씨는 “둑 쌓을 때 지금처럼 장비 가지고 한 거는 아니고, 우리가 등짐 메고 다 올라갔어. 흙을 한 평 정도 퍼서 제방을 만들면 100원 정도 받았어. 근데 다 못하면 70원도 받기도 하고, 80원 받기도 하고”라고 말했다.

▷1970, 80년대 무와 단무지

주민들은 제방을 쌓은 뒤 낙동강과 백천, 신천이 만들어낸 삼각지에 퇴적물이 쌓인 후포평야를 배경으로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습기가 많은 이곳에는 채소 농사가 잘 됐기 때문에 무를 주로 심었다. 후포 무는 평균 길이가 70㎝로 길고 커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이 무는 단무지로 만들기에 적합해 대규모 단무지 공장이 마을에 들어서기도 했다. 지금은 무를 재배하는 농가가 없지만, 80년대까지 운영한 단무지 공장은 지금도 겉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오이, 수박, 호박

1980년 후반부터 무 농사는 호박, 오이, 수박, 참외 등에 자리를 내주었다. 주민들은 호박, 오이, 수박 등 손이 많이 가는 대신 참외는 상대적으로 재배하기 쉽기 때문에 90년대 중반부터 황금참외 재배를 선택했다.

박기용(83) 씨는 “그때 참외는 비닐하우스가 아니고, 노지에서 했어. 노지에 종자를 심어 재배하는 식이었지”라고 말했다.

▷1990년대 이후 참외와 밀

성주 참외는 전국 참외 재배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무릉의 젖줄, 후포평야에는 무릉을 포함한 선남면, 용암면 등 1천100개 농가가 참외를 재배하고 있다. 풍부한 습기와 일조량, 기름진 토질 등으로 특히 달콤한 후포 참외가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무릉 주민들은 현재 게르마늄`바이코라(이상 비료의 한 종류)`참고을`무릉작목반 등 4개의 참외 작목반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참외와 함께 밀 재배가 각광을 받고 있다. 밀을 바탕으로 한 웰빙사업이 새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포평야 끝자락 낙동강변의 대규모 밀 재배단지는 무을의 ‘참고을작목반’과 연결된다. 이 작목반은 용암면에 우리밀 가공공장을 설립, 선원리에서 생산한 밀을 가공하고 있다. 전체 50여 가구 중 25가구에서 48㏊ 부지에 밀을 재배하고 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여수경`이재민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장병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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