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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낙동강시대] 36] 성주 무릉마을
작성자 참외향기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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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11-03-26 11: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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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낙동강시대] 36] 성주 무릉마을<2>
삼한시대∼20세기… 1,500여 년 낙동강 수로 관장 '東安津' 옛 터

 

무릉과 도원, 새창, 파밭골 등 4개 자연마을로 이뤄진 ‘무릉도원'(武陵桃源) 성주군 선남면 선원리. 성주 6개 읍면을 적신 이천(伊川:백천)이 성주 선남면 최남단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삼각지에 자리 잡고 있다. 1천500여 년 전 삼한시대부터 동안(東安)나루의 긴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고대에서 근대까지 강과 하천을 중심으로 한 나루와 물류 중심지에서 현대에는 참외 농사와 공단 지역으로 변모하는 등 상당한 변화를 겪은 마을이다.

 

 
 
무릉마을 전경
 
1982년과 2004년의 무릉마을 항공사진. 그동안 후포제방과 선원제방을 쌓고, 백천을 잇는 선원교와 신천을 잇는 가죽정교를 건립하는 등 마을에는 큰 변화를 일어났다.
 
무릉 옆 새창의 낙동강변에는 삼한시대와 고려시대 각각 동안나루와 동안창이 설치돼 물류교통의 중심 역할을 했다.
◆물류`교통의 중심, 동안창과 동안진

선원리 무릉과 도원 사이의 자연마을인 새창은 일찍이 삼한시대부터 물류교통의 중심지였다. 새창마을을 중심으로 한 선원리 일대는 낙동강을 낀 덕분에 삼한시대부터 수로 운송이 발달해 나루터를 관장하던 관원(官員)이 상주했다고 한다. 바로 동안진(東安津)의 본거지였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옛 동안이란 지명은 지금 도원(桃園)으로 바뀌었다. 마을에는 나루와 함께 역원(驛院)도 설치됐다.

삼한시대 진한 소국들이 신라로 편입되고, 변한 소국들이 대가야로 복속되던 시기, 신라는 삼한시대부터 이어온 동안진의 역원을 정비했다. 소지왕이 집권하던 487년 무렵이었다. 동안진은 이후 고려 성종 11년(992년) 나라에 조세로 바치던 곡물의 원활한 운송을 위해 배로 실어 나르는 창고인 조창(漕倉)을 갖췄다. 이 동안진의 조창인 동안창(東安倉)은 고려부터 조선 고종(高宗) 때까지 마산 합포의 석두창(石頭倉)에서 안동의 안동창(安東倉)으로 향하는 수운교통로 중간에서 보조창고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동안창이 있던 이 마을은 조선시대 말기 신창(新倉) 또는 새창이란 이름으로 굳어졌다. 동안창은 고려 초기부터 조선말까지 나라에 바치는 세곡이나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로 운용됐고, 근현대 들어서는 남해안 소금과 수산물의 중간 창고로 활용됐다.

동안나루터는 현재의 성주대교와 제2선원교 중간지점 낙동강변이다. 이 나루터는 고려와 조선시대 조공(朝貢)과 세곡의 이동통로, 근현대 남해안 소금과 수산물의 중간 교통로, 이후 성주대교 건설 전까지 대구를 잇는 교통로와 고기잡이배의 기착지가 됐다.

박병호(62) 씨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이 나루에서 성주 선남면과 대구 달성군 하빈면을 연결하는 나룻배를 운용했다고 한다.

박병호 씨는 “(성주)대교 하고 양수장 중간에 옛날부터 나루터가 있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부지가 따지고 보면 선장이었지. 대구 갈 사람은 우리 배 안 타면 못 가는 거지”라고 말했다.

삼한시대부터 20세기까지 이어온 동안나루는 1970년대 성주대교 등이 생기면서 점차 그 기능을 잃어 이젠 그 터마저 사라졌다.

 

◆강과 하천, 마을의 변화

삼각지에 자리 잡은 무릉은 삼면 중 이면이 낙동강과 백천에 둘러싸여 늘 안개가 피어올랐고, 선원교와 성주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쉽게 접근하기도 힘든 마을이었다. 안개가 뿌옇게 뒤덮이고,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으면서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며 무릉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물로 둘러싸인 마을이지만, 정작 먹고 마실 물은 없어 아낙네들이 매일 강에서 물을 지고 날라야 했다. 여름 홍수기에는 낙동강과 이천이 수시로 흘러넘쳐 제방을 쌓기 전까지 넓은 후포(後浦) 평야에서도 논농사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마을을 감싼 두 물길은 주민들의 놀이터이자, 공동생활 공간이기도 했다. 하얀 백사장에서는 해마다 씨름대회가 열렸고, 아이들의 온갖 놀이가 펼쳐졌다. 통발과 낚시를 통한 고기잡이도 성행했다. 특히 수심이 얕은 백천은 주민들의 공중목욕탕이자, 빨래터 역할을 했다.

무릉은 1970년대 성주대교와 선원교를 건설하기 전까지 닫힌 마을이었다. 걷거나 우마차 등을 활용해도 남쪽 고령이나 동쪽 대구로 나갈 수 없었다. 유일한 교통수단은 낙동강이나 백천을 건너는 나룻배뿐이었다. 그만큼 육로 대신 낙동강을 이용한 수운 교통과 나루가 활성화됐던 셈이다.

무릉의 가장 큰 변화는 1960년대 제방공사를 통한 본격적인 농사와 1970년대 선원교와 성주대교 건설 등을 통한 교통로 확보가 계기가 됐다.

1962년 이천 양쪽으로 후포제방과 선원제방을 준공하면서 홍수기 물 범람을 걱정하지 않고 참외 비닐하우스 등 제대로 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성주 참외 산지의 명성을 쌓는 출발점이 된 것. 1970년 무릉과 후포평야를 잇는 시멘트 다리인 선원교가 건립되면서 농작물 재배와 운송이 활발하게 이뤄졌고, 1975년 성주대교 건설은 무릉과 대구를 잇는 교통로 확보로 인적`물적 교류의 물꼬를 트게 됐다. 이후 2000년대 성주대교를 매개로 무릉마을 주변에 공장이 잇따라 설립되면서 ‘대교공단’을 중심으로 한 2차산업과 후포 평야를 중심으로 한 1차산업이 공존하는 마을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6`25, 피란과 복구

6`25전쟁 당시 무릉은 아군과 적군의 주요 관심 대상지였다. 낮은 구릉과 수로를 통한 이동 등 교통로로 잘 활용할 수 있는 지리적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군과 미군은 적들의 이동경로를 차단하고, 마을을 통한 물자 공급을 막기 위해 불태우거나 폭격하는 대상지로 삼았던 것. 주민들은 ‘인민군들이 곧 내려온다’ ‘미군 전투기가 폭격할 예정이다’는 등 갖가지 소문을 들은 뒤 일제히 마을을 떠나야 했다. 주민들은 대구로 가장 많이 피란을 떠났고, 나머지는 성주 등으로 향했다. 당시 낙동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배를 타거나 수심이 얕은 쪽 물살을 헤치고 걸어서 건넜다고 한다.

박기용(83) 씨는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로 우에 가겠노. 다리가 없었잖아, 지금 그 성주대교가. 그래 물이 얕은 곳으로 건너갔어. 배로 가는 사람은 몇이 없었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피란을 떠났다 돌아온 뒤 막막하기만 했다. 피란 후 돌아올 것을 대비해 간혹 식량을 마당에 묻어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 옷 보따리 등 꼭 필요한 것만 챙겨 서둘러 피란을 간 터라 돌아온 뒤 먹고살 방책이 별로 없었다. 무릉 대다수 집은 불타거나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우선 움막을 지어 잠자리를 마련하고,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집을 짓기 위해 면사무소에서 나무를 배급받고,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강을 따라 내려온 유실탄과 군인들이 마을에 숨겨 둔 지뢰가 폭발해 숨지거나 다치는 주민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현재의 무릉마을 집은 모두 6`25전쟁 이후 새로 짓거나 최근 개축한 것이다. 6`25는 이처럼 마을에 큰 상처를 남겼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여수경`이재민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장병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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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3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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